우리집에 삼보 386 중고를 처음 들여놓았을 때가 생각난다.


그 전에는 갱지를 얻어다 낙서를 했고 


다 쓴 갱지들이 차곡차곡 쌓여갈 무렵엔


지워서 다시 사용하거나, 볼펜으로 덧그림을 그리곤 했다.


그런데 컴퓨터로는 한번에 싹 지워지니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새그림'만 눌렀다 하면 요술같이 튀어나오는 백지는 


묘한 쾌감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것에 점점 흥미를 잃게 됐다.


처음에는 매력의 원인이었던 무한히 제공되는 백지 때문이었다.


어차피 백지를 불러오면 되니까 덜 성의있게 되고


성의가 덜하다보니 그림은 자꾸 망치고


망치면 쉽게 쉽게 새그림을 누르곤 해서 


결국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남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386컴퓨터 운운하며 글을 시작했던 이유는


왜 인생엔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리셋기능이 없을까 


하는 푸념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시절에 대해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니,


역시- 인생에는 리셋기능이 없는게 낫다.



내 인생에는, 예쁘게 다듬어진 부분도 있고


군데군데 흉하게 패인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때묻은 가죽시계처럼 버릴데가 없는 것이다.


좌절했을 때도 있었고 자포자기의 심정일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나는 스스로의 인생에 애정을 갖고 살아온 것 같다.


부족할지언정 한발짝씩 뗄 때마다 성의있게 임했다고 생각한다.



만일 리셋기능이 있었다면 


내 인생은 남에게 보여지기 위한 탑을 쌓는 여정에 불과했겠지.


아니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자기만족의 저 높은 꼭대기 어딘가를 향하다가


무한 리셋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경우든, 지금처럼 내 삶을 '애정'할 수는 없었을거야







이 정도라면, 인생의 100%를 즐길만한 자세가 되어있는걸까?


'100%'를 인생의 모토로 삼기 시작했던 스무살의 나와는 너무나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덤벼볼만 하다고 생각한다.


포기하라고


넌 이제 그만 네 자신을 포기하라고 


넌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현실 속에서도 내 자신을 믿어주는 것.


지금의 내겐 그게 필요하다.


설령 내 자신이 믿고 있는 바가 진실이 아닐지라도.


인간은 믿는 바대로 되어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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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봉

    제가 올해 읽은 글중에 가장 값진 글입니다

    2013.09.22 02:05 신고  ×  +
  2. Re. 삼토

    아...감사합니다. 미봉님 덕분에 저도 다시금 이 글을 읽으며 그때의 마음을 되찾네요. 한 해의 마지막 달, 뜻있게 보내시길 빕니다:)

    2013.12.16 15:54 신고  ×
  3. 비밀댓글입니다

    2014.02.05 0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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